일본 약국이 대형화된 이유?(드럭스토어, 의약분업, 셀프메디케이션)

편의점 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편의점보다 많은 게 있다면 믿겠습니까. 2023년 일본 후생성 통계 기준으로 일본 전국의 약국 수는 62,375개입니다. 편의점 58,000개를 훌쩍 넘습니다. 제가 처음 도쿄 골목을 걷다가 5층짜리 드럭 스토어를 마주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약국이라기보다는 마트 같고, 마트라기보다는 박람회장 같았습니다.

약국이 편의점을 넘어선 진짜 이유

일본의 약국 급증은 단순히 약을 많이 먹는 국민성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에는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라는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초고령사회란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비율이 20%를 넘는 사회를 뜻하는데, 일본은 이미 그 비율이 29%에 달합니다. 65세 이상 인구만 3,600만 명이고, 80세 이상이 전체의 10%를 넘어선 나라는 지구상에서 일본이 유일합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노인이 늘면 의료비가 폭증합니다. 일본 정부는 이대로 가면 국민 의료비가 연간 500조 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측을 받아 들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 1년 예산이 657조 원이니, 의료비 하나가 그에 육박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감이 오실 겁니다.

그 돌파구가 바로 의약분업(醫藥分業)이었습니다. 의약분업이란 진료는 의사가, 약 조제는 약사가 각각 담당하도록 역할을 나누는 제도입니다. 일본은 1995년에 이를 도입했는데, 처음에는 병원 선택에 맡기는 임의제로 운영되어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의료비 위기감이 커지면서 강제성이 높아졌고, 그 결과 약국의 수익성이 극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 약사가 조제하면 복약지도료(服藥指導料)라는 수가를 별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약지도료란 약사가 환자에게 복용 방법과 주의사항을 안내한 대가로 받는 수수료인데, 한국은 약 1,000원 수준인 반면 일본은 그 열 배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 하나가 약국 창업 붐을 만들었습니다.

드럭스토어, 약국이 마트가 된 사연

수익성이 좋아진 약국들이 다음으로 한 일은 매장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넓어진 게 아니라, 파는 물건의 종류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드럭스토어(drug store)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드럭스토어란 약국을 기반으로 하되 화장품, 식료품, 생활용품, 주류, 도시락, 반려동물 용품까지 함께 취급하는 복합 소매 매장을 말합니다.

전략은 단순합니다. 약은 마진이 높아 여기서 충분한 이익을 확보하고, 나머지 상품은 편의점이나 일반 마트보다 저렴하게 팔아 고객을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드럭스토어에서 약은 절대 세일하지 않습니다. 어느 매장에 가든 1층 가장 좋은 자리는 항상 약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오사카 드럭스토어를 돌아다녀봤는데, 과자나 음료를 사러 들어온 손님이 결국 약 코너 앞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나오는 장면을 꽤 자주 목격했습니다.

일본의 드럭스토어 현황을 수치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전국 약국 62,375개 중 드럭스토어 형태가 약 35%를 차지
  2. 매출 구성비: 의약품·화장품과 식료품·가정용품이 각각 약 50%씩
  3. 도심 기준 5층 건물 통째 사용, 도시 외곽은 600평 이상 대형 매장 다수
  4. 대부분 대기업 직영 체인으로 운영, 바잉 파워(구매협상력)가 막강
  5. 전문 의약품을 취급하지 않는 매장은 약사 대신 등록판매사를 두어 인건비 절감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 익숙한 돈키호테도 이 드럭스토어 계열에 포함됩니다. 약과 화장품을 사러 들어갔다가 과자 봉지를 한 아름 안고 나오게 되는 구조, 그게 바로 이 전략의 핵심입니다.

셀프메디케이션 센터로의 진화

일본 정부가 약국에 기대하는 역할은 단순한 약 판매 그 이상입니다. 셀프메디케이션(self-medication)이라는 개념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셀프메디케이션이란 전문 의료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일본 정부는 전국에 촘촘히 깔린 약국 네트워크를 이 개념의 인프라로 활용하려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돌봐야 할 노인이 너무 많으니 국가가 다 감당할 수 없고, 그러니 본인이 어느 정도 스스로 관리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약국에서는 현재 이런 서비스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혈액 채취, 체지방 측정, 골밀도 검사, 치매 조기 검사까지 가능하고, 영양관리사를 두어 당뇨 환자에게 맞는 식단 상담도 제공합니다. 더 나아가 거동이 불편한 고령 환자의 집을 약사가 직접 방문해 약을 전달하고 복약 상태를 확인하는 재택 복약관리 서비스도 운영합니다.

약수첩(お薬手帳)이라는 제도도 인상적입니다. 약수첩이란 개인별 복약 이력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수첩으로, 어느 약국을 가든 약사가 이를 확인해 중복 처방이나 부작용을 예방합니다. 일본인의 약 80%가 이 수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날로그적이지만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일본 후생노동성(厚生労働省)은 이 약수첩 디지털화와 지역 약국의 의료 연계 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불을 지른 드럭스토어 대형화

일반적으로 드럭스토어의 대형화는 고령화 대응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제가 현지에서 직접 둘러보니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도심 번화가,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지역의 드럭스토어는 규모나 진열 방식 자체가 내수 고객보다 외국인을 겨냥한 구조였습니다.

실제로 2023년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2,500만 명을 넘었고, 2024년에는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문제가 공론화될 정도로 급증했습니다. 오버투어리즘이란 특정 지역에 관광객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주민 생활과 환경에 악영향이 발생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엔저(円低) 기조가 이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엔저란 일본 엔화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상태를 뜻하는데, 외국인 입장에서 일본 물가가 체감상 크게 저렴해지는 효과를 낳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시아권 관광객, 특히 중국인 여행객의 의약품 구매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2016년 일본이 약을 면세 품목으로 포함하면서 그야말로 불이 붙었습니다. 감기약, 파스, 소화제를 박스째 쓸어 담는 장면이 뉴스에 등장할 정도였고, 내국인들이 감기약을 구하지 못하는 품귀 현상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수요가 대형 드럭스토어 확장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느꼈습니다. 일본프랜차이즈협회(日本フランチャイズ協会) 자료를 보면, 드럭스토어 업태의 매출 성장률은 최근 수년간 편의점과 슈퍼마켓을 모두 웃돌고 있습니다.

서양권 관광객이 칼이나 공예품을 사 가는 것과 달리, 아시아권에서는 식품과 의약품 구매가 1위를 차지한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돈이 몰리는 곳에 매장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드럭스토어는 그 흐름을 정확히 탔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일본 드럭스토어에서 한국인이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약은 어떤 건가요?

A. 처방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OTC, Over-The-Counter)은 파스, 소화제, 진통제, 감기약, 위장약 등 다양합니다. 매장 입구에 '처방전(処方箋)' 표시가 없는 드럭스토어라면 약사 대신 등록판매사가 상주하며 일반의약품만 취급합니다. 처방전 표시가 있는 매장은 전문의약품까지 구입 가능합니다.

Q. 일본 약국이 한국 약국보다 약이 잘 듣는다는 말, 사실인가요?

A. 성분 자체가 다른 경우가 있어 체감 효과 차이가 생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 감기약 중 일부는 한국에서 처방전 없이 판매가 제한된 성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 약이 전반적으로 더 효과가 좋다"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인식입니다. 특정 제품의 특정 성분이 본인에게 잘 맞는 경우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Q. 한국도 일본처럼 드럭스토어 형태로 바뀔 가능성이 있나요?

A.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한국도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에 근접하고 있고, 의료비 증가 압박은 일본이 걸어온 길과 닮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은 의약분업 규정이 일본보다 엄격해 약국이 식료품을 함께 파는 것에 법적 제약이 있습니다. 제도 변화 없이는 단기간에 일본식 드럭스토어 모델이 그대로 이식되기는 어렵습니다.

Q. 일본의 약수첩(お薬手帳)은 외국인도 사용할 수 있나요?

A. 일본에서 약을 구입하거나 처방을 받을 때 약수첩 발급을 요청하면 외국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앱 형태의 디지털 약수첩도 보급되고 있어 여행 중 단기 체류자에게도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러 약을 함께 복용할 경우 중복 성분을 확인하는 데 실용적입니다.

일본의 약국이 걸어온 길은 사실 우리가 5~10년 내에 마주칠 풍경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령화 속도로 따지면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빠릅니다. 지금은 관광지에서 파스 한 박스 사 오는 재미로 드럭스토어를 바라보지만, 머지않아 이 구조가 우리 의료 체계의 대안으로 논의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실험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릅니다. 하지만 그 실험의 내용만큼은 지금부터 꼼꼼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약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의약품 복용과 관련한 사항은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y-gRH0G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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