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위의 경제력을 유지하는 일본 경제의 힘(잃어버린 30년, 1차소득수지, 소부장)
일본의 대외순자산은 533조 엔, 우리 돈으로 약 4,000조 원이 넘습니다. 잃어버린 30년을 보낸 나라치고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숫자입니다. 제가 직접 일본을 오가면서도 이 숫자를 다시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리는 활기차고 관광객은 넘쳐나는데 "무너진 나라"라는 말이 쉽게 겹쳐지지 않았으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30년, 사실은 '초저속 전진'이었다
일본이 30년을 통째로 날렸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저도 한때
일본 경제가 역성장의 늪에 빠져 있었다고 막연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수치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같은 기간 일본의 연평균 성장률은
마이너스가 아닌 약 1% 안팎의 플러스였습니다. 한국이 4~5%, 중국이 8~10%씩
달려 나가는 동안 일본은 터벅터벅 걸었을 뿐, 뒤로 간 건 아니었다는
뜻이죠.
여기에 디플레이션이라는 변수도 있습니다. 디플레이션이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경제 활력을 갉아먹는 독이지만,
역설적으로 물가가 오르지 않으니 임금이 제자리여도 실질 구매력이 급격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극단적 파탄
없이 버텨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출발선이
달랐습니다. 1990년 버블 붕괴 직전,
일본은 세계 GDP의 약 15%를 차지하는 나라였습니다. 당시 NTT,
스미토모은행, 도요타 같은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가총액 상위를 독차지했고,
도쿄의 황거(천황이 사는 곳) 땅값 만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버블이 꺼졌다고 해서 그 시절 깔아 놓은
공장, 항만, 철도, 금융 자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신흥국이
단기간에 역전하기엔 그 격차가 너무 컸었던 겁니다.
나라가 버는 돈, 1차 소득 수지의 힘
일본을 여전히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팔아 먹고사는 수출 대국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일본의 진짜 돈줄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해외로
옮겨갔습니다.
2024년 일본의 1차 소득 수지 흑자는 약 41조 7,000억 엔에 달했습니다. 여기서 1차 소득 수지란 해외에 투자해 놓은 자산에서 들어오는 이자, 배당금,
자회사 이익의 합산을 의미합니다. 미국 국채 이자, 해외 기업 지분 배당, 해외 공장의 수익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죠. 같은 해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가 약 29조 엔이었는데, 1차
소득 수지만으로 그걸 훌쩍 넘어버립니다. 상품 무역에서 적자를 봐도 해외
투자 수익이 덮고도 남는 구조입니다(출처: 일본 재무성).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국채입니다. 2024년 4월 기준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는 약 1조 2,000억 달러로, 세계 최대 보유국 중 하나입니다. 수익률을 보수적으로 3%만 잡아도
연간 이자 수익이 약 360억 달러에 달합니다. 슬로바키아나 크로아티아 같은
유럽 중견국의 연간 정부 예산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여기에 미쓰비시 상사,
미쓰이물산, 이토추 같은 종합상사들이 전 세계 광산, LNG 프로젝트, 발전소,
항만의 지분을 들고 있으면서 수십 년짜리 운영권 수익을 꾸준히
걷어옵니다.
문제는 이 돈이 고스란히 국민 지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해외
자산 수익의 상당 부분은 현지에서 재투자되고, 국내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라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하다'는 역설이 바로 여기서
생깁니다. 일본을 직접 가보면 물가가 조금씩 오르는 게 느껴지는데, 그
무게를 오롯이 서민들이 짊어지고 있는 셈이죠.
소부장의 나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돈을 번다
일본 소부장이 강한 이유
일본 소부장이 이토록 견고한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수십 년간 특정 공정에만 집중한 기술 축적으로 후발 주자가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렵다
- 완성품 시장의 경쟁자가 늘수록 그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일본의 매출도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 자동차, 산업용 로봇, 공작 기계, 탄소섬유, 특수 필름 등 다양한 산업군에 걸쳐 있어 특정 분야 침체에 흔들리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이 완성품 시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일본은 그 싸움에 쓰이는 재료를 파는 영리한 위치를 차지해왔다는 게 제 시각입니다. 누가 이기든 일본의 소부장 매출은 나옵니다.
1억 2천만 내수 시장과 국채 구조, 양날의 칼
자주 묻는 질문
Q.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동안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했나요?
A. 아닙니다. 연평균 1% 안팎의 극히 낮은 플러스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같은 기간 한국, 중국 등과의 성장 격차에서 나온 상대적 평가입니다. 역성장이나 경제 파탄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Q. 일본 국가부채가 GDP 대비 250%인데 왜 부도가 안 나나요?
A. 국채의 약 88%를 자국 은행, 보험사, 국민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외환 위기 구조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모든 국채가 엔화로만 발행되어 달러 부족으로 인한 국가 부도 가능성이 낮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다만 이 구조도 2030년대 이후에는 흔들릴 수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Q. 일본이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과 대만에 밀렸는데 제조업이 괜찮은 건가요?
A. 완성품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 완성품을 만드는 데 필수인 소재·부품·장비 영역에서는 오히려 강해졌습니다. 포토레지스트 세계 시장의 약 90%, 반도체 소재 시장의 약 50%를 일본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누가 반도체 시장에서 이기든 일본 소부장 업체에는 주문이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Q. 1차 소득 수지가 좋으면 일본 국민 생활도 좋아지나요?
A.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해외 자산에서 벌어 들인 수익의 상당 부분은 현지에서 재투자 되거나 대기업에 집중되고 국내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엔저가 겹치면서 수입 물가가 오르고 서민 생활은 더 팍팍해지는 역설이 생기고 있습니다.